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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녀에게> 소통과 사랑 그 성공에 대해

     이번 12월 31일에 재?개봉한 <그녀에게>보고 왔습니다. 2015 마지막 멜로라고 홍보하던데, 이 영화를 멜로로 홍보해도 괜찮은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멜로라고 할 수도 있긴 하지만서도 멜로로 보기엔 조금 섬득한 영화인데요. 그럼 이 독특한 멜로? 영화의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리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스페인 거장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기존에 볼수없었던 독창적인 스타일로 유명한 감독이다. 좋게 말해 독창과 파격이지, 그의 작품들은 문제작이라고 평해지기도 한다. 그의 2002년 작인 <그녀에게> 또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이러한 개성이 잘 담겨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현대무용의 어머니 피나 바우시의 <카페뮐러>로 시작하고 <마주르카 포고>로 끝난다. 소통수단으로 몸을 이용하는 발레, 그 중에 그 극단의 끝을 실험한 피나 바우시의 작품들이 영화에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는 점은 꽤나 흥미롭게 느껴진다. 소통과 사랑, 그리고 사랑의 기준에 대해 얘기해보자고 제안하는 <그녀에게>에는 여러 관계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누구 y 누구"라고 친절히 자막으로 알려주기까지하는 관계가 이번 영화의 주요 축들을 이룬다. 우선 리디아와 마르코의 관계이다.


LYDIA Y MARCO


     마르코가 리디아의 집에 침입한 뱀을 잡으면서 리디아와 마르코의 관계가 시작된다. 이 둘의 관계는 비교적 정상적인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게 정상적이지만은 않다. 둘다 이 관계를 이어나갈때 과거에 얽매여있는데, 마르코는 안젤라를, 리디아는 엘니뇨를 잊지못한다. 마르코는 뱀을 잡을때 눈물을 흘렸던 이유가 헤어진 애인인 안젤라 때문이었다. 안젤라의 결혼식에서 기뻐하는 마르코에게 리디아가 하지 못한 말은 사실 그녀가 엘니뇨와 다시 합쳤다는 말이었다. 마르코가 10년에 걸쳐 잊지못했던 안젤라와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는 순간에, 리디아는 엘니뇨와의 관계로 돌아가는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장면이 이 둘의 관계를 잘 설명한다. 또한 차에서 둘의 대화가 일방적인 대화임을,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리디아가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자 마르코는 그녀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말도 건네지 못하고 시트조차 갈아주지 못한다. 엘니뇨가 나타나 사실 리디아와 엘니뇨가 다시 합쳤었다는 말을 들은 마르코는 쿨하게 리디아를 엘니뇨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넘겨준다. 이 장면은 리디아와 마르코의 관계에 대한 마르코의 일종의 포기와 같이 느껴진다. 이후 결국 리디아는 죽고마는데, 혼수상태에 말을 건네지 못한다는 점이나 관계를 포기하고 결국 그녀가 사망한다는 점에서 다음에 나오는 앨리샤와 베니뇨의 관계와 사뭇 다르다.


ALICIA Y BENIGNO


     베니뇨의 앨리샤를 향한 이 일방적이고 스토커적인 사랑은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늘상 논란이다. 어렸을 때부터 20년동안 어머니를 돌봐드렸던 베니뇨는 표현 방식이 흔히들 말하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있다. 앨리샤의 뒤를 쫓아 집을 알아내고 그 집에 들어가 머리핀을 훔쳐오는 그는 유아기적인 형태의 사랑을 보여준다. 이 사랑은 순수하지만 순수한만큼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을 돌보는 방식으로 밖에 사랑을 할수 없는 그는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앨리샤의 전담 간호사가 되어 그녀를 밤낮으로 돌보며 사랑한다. 늘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그는 그녀와 대화한다고 굳게 믿고있다. 그리고 또한 기적을 믿고있는 그는 어쩌면 가장 종교적인 형태의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을 강간하다가 수녀들로 옮겨갔던것처럼 베니뇨는 앨리샤를 강간? 성관계?를 맺게 된다. 극중극인 <줄어든 연인>으로 표현된 이 성관계로 그녀는 임신을 하게된다. 이로 인해 앨리샤는 기적적으로 깨어나지만, 끝내 베니뇨는 파멸하고 만다. 이 관계를 사랑으로 부를 수 있을까? 사랑의 기준은 무엇일까? 어디까지 정상이고 비정상인가? 감독은 이에 대해 어떤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다. 다만 관객에게 질문을 할뿐.


BENIGNO Y MARCO


     그리고 내 기억이 자막으로 등장했다고 믿는 베니뇨와 마르코(Benigno y Marco)이다. 사실 이 둘의 관계는 자막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개인적으로 극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 둘의 교도소에서의 면회 장면은 특히 이 둘의 관계를 잘 나타내는 장면이다. 이 둘이 교도소에서 첫번째로 면회를 가졌을 때, 둘을 가로막은 유리에 비친 마르코의 반영이 베니뇨와 겹치고, 베니뇨의 반영은 마르코와 겹친다. 대화 또한 베니뇨는 밤에 마르코를 생각한다고 한다. 마르코는 놀라지만 주로 그때 마르코의 책을 읽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베니뇨는 마르코와 리디아가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마르코와 베니뇨, 둘이 정말로 같이 여행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 둘이 두번째로 면회를 가졌을 때는 이제 아주 노골적이다. 말하는 내용 또한 대놓고 동성애적 코드를 지니고 있고, 처음 베니뇨가 유리막에 손을 얹자 마르코가 손을 얹고, 이후에는 마르코가 손을 얹자 베니뇨가 손에 키스를 해서 유리막 위에 올리는 장면은 이 둘의 사랑을 잘 보여준다. 이 장면들은 이 둘의 관계야 말로 합일을 이룬 진정한 의미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게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마르코와 앨리샤이다.


MARCO Y ALICIA


     이 둘의 관계는 영화에 주축으로 등장하는 관계라기보단 영화의 엔딩을 열리게 만드는 미래지향적인 관계에 가깝다. 마르코와 엘리샤 그 사이에 베니뇨를 위한 듯한 빈 자리. 베니뇨가 앨리샤를 위해 준비해둔 집을 마르코에게 물려주는 등 둘이 새로운 관계를 이룰 것이라는 암시는 위 장면과 자막 말고도 있다. 물론 그 관계가 앞으로 성공적일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영화 <그녀에게>는 이러한 파격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파격을 추구한다. 보통의 경우에 이런식의 관계도라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위대한 개츠비> 식의 구도이다. 개츠비가 주인공이지만 닉 캐러웨이가 관찰자적인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닉 캐러웨이는 관찰자에 머물고 그의 의야기는 서브 플롯에 머문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개츠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마르코는 베니뇨를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서 어쩌면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더 중요한 인물에 가까워 보인다. 리디아와 마르코의 이야기는 사실 한편의 독립적인 이야기라고 봐도 문제가 없을 정도이다. 이 관계는 앨리샤와 베니뇨의 관계만큼이나 극을 이루는데 중요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영화의 한 축이다. 원 포스터에도 이런 구도가 잘 나타난다. 그러다보니 영화가 조금 두서없이 느껴질 순 있다. 리디아와의 마르코의 관계가 주인 것 같다가, 이후 엘리샤와의 베니뇨의 관계가 주인 것같다가, 다시 마르코와 베니뇨가 주인 것처럼 느껴지기다가, 또 마르코가 주인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게 인생 아닐까? 누구나 그의 인생에서 주인공은 바로 그 자신이다. 리디아, 마르코, 베니뇨, 앨리샤 그 누구 하나 버려서 이 영화가 유지될 수 없다. 좀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런 독창적인 플롯을 끝까지 밀고나간 감독의 뚝심이 빛나는 순간이다.